3 Dots
▪ 패션 아티잔(Artisan) 브랜드는 장인 정신에 기반해 수작업으로 고품질의 제품을 소량 제작한다.
▪ 새로운 퍼포먼스, 틀을 깬 패션쇼 등 기존 패션 산업의 관행을 깨부수는 메시지를 보여주며 옷을 매개로 목소리를 내기도 한다.
▪ 드러내지 않는 쪽을 택한 폴 하든(Paul Harnden), 업계 관행에 비판적 메시지를 던지는 캐롤 크리스찬 포엘(Carol Christian Poell), 예술ㆍ문화로 경계를 뛰어넘는 블레스(Bless), 장인정신으로 무장한 비즈빔(Visvim) 등 아티잔 브랜드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묵직한 존재감을 자랑한다.
우리가 소비하는 옷은 대부분 빠르게 생산되고 빠르게 사라진다. 유행은 일주일 단위로 바뀌고 온갖 브랜드는 새로운 룩을 점점 짧은 주기로 제시한다. 하지만 누군가는 이 흐름에 저항하듯 느리게, 고집스럽게 옷을 만든다. 소재는 수십 년 된 직기로 천천히 직조되며 어떤 옷은 흙 속에 묻혔다가 세상 밖으로 나오기도 한다. 이름도 낯설고 정보도 부족하고 제품 가격은 수백만 원에 달하기까지 해 어딘가 비현실적이다. 그런데도 이런 옷을 찾는 사람들이 있다.
“아티잔(Artisan)”이라는 단어는 원래 장인을 뜻한다. 오늘날 패션계의 아티잔 브랜드는 단순히 수작업으로 만들어진 고급 옷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옷을 매개로 세상과 관계 맺는 방식을 보여주며 독창적인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들은 대량 생산과 유행, 마케팅 중심의 패션 산업에서 한 발짝 물러나 자신만의 속도와 세계관으로 창작을 이어간다.
한국에서는 마니아층을 중심으로 아티잔 브랜드가 알려져 있다. 고품질 핸드메이드의 희귀한 아이템, 또는 무채색의 다크웨어나 과거를 복각한 스타일의 고가 브랜드로 해석되곤 한다. 아티잔 브랜드는 만든 사람의 이야기도 거의 찾아볼 수 없고 극소수의 옷만 취급하는 폐쇄적인 성향을 띄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번 글에서는 여타 브랜드 대비 소량 생산하면서 확고한 메시지를 독창적인 방식으로 전달하는 브랜드까지 확장해 탐구해 보려고 한다.
마케팅하지 않는 마케팅: 폴 하든(Paul Harnden)
폴 하든(Paul Harnden)에 대한 정보는 무척 귀하다. 인터뷰를 극도로 꺼리며 SNS 활동도 거의 하지 않기 때문이다. 캐나다 출신의 폴 하든은 1987년부터 신발을 만들기 시작했다. 1985년 영국 브라이턴(Brighton)으로 이주해 전통 제화기술을 익혔는데 그의 가죽 신발은 섬세한 무두질로 가볍고 부드럽기로 유명하다. 폴 하든은 트위드, 리넨, 가죽 등의 소재를 주로 사용해 작업하며 신발로 시작해 지금은 남성복 중심의 아이템을 다루고 있다. 정교한 디자인의 블레이저와 재킷 역시 유명하다. 디올과 메종 마르지엘라를 이끈 패션 디자이너 존 갈리아노(John Galliano)가 극찬한 바 있으며 최근에는 지드래곤이 폴 하든 제품을 즐겨 입는 것으로 알려졌다.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의 소설 『올리버 트위스트』를 생각하면 폴 하든의 스타일을 떠올리기 쉽다. 목가적인 영국 시골 느낌을 자아낸다. 신발 앞 코가 위쪽으로 휘어져 요정 신발처럼 보이는 것도 특징이다. 모양뿐만 아니라 어쩐지 새 느낌보다는 빈티지에 가깝다. 특유의 느낌을 내기 위해 옷을 땅속에 묻었다고도 전해진다.
폴 하든은 마케팅 활동에도 소극적이다. 일반적인 패션쇼가 없다. 공식 사이트 역시 심플하다 못해 사이트라 볼 수 없을 정도다. 흰 화면에 브랜드명과 암호처럼 ^8m*+,J1/4%?@p=~#3Kf란 텍스트만 적혀 있다. 인스타그램에는 고전 흑백 영화 자료를 모아 놓은 듯 브랜드가 복각하는 시대상의 이미지와 영상이 올라와 있다.
이토록 비밀스러운 소통은 제품 구매 경험에도 일관되게 적용된다. 극소량만 만들어지며 극소수의 셀렉숍에서만 판매한다. 폴 하든의 제품을 판매하는 한 셀렉숍 온라인 스토어에 들어가 보니 상품 이미지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의뢰한 손님에게 개별 메일로 사진을 보내준다. 이런 흐름은 단순히 마케팅을 위한 신비주의 전략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침묵을 지키고 일관된 태도를 유지하는 그 자체가 폴 하든의 묵직한 메시지이자 소비자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反 패션의 외침: 캐롤 크리스찬 포엘(Carol Christian Poell)
캐롤 크리스찬 포엘(Carol Christian Poell)은 오스트리아 출신의 창작가로, 가족 대대로 가죽 제품을 만들어왔다. 그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가죽을 가공하는 데 전문성이 있었고 재료를 끊임없이 탐구하고 변형하는 데 관심이 많았다. 이탈리아 밀라노의 도무스 아카데미(Domus Academy)에서 패션 디자인을 공부한 후 1995년 본인의 이름을 건 브랜드를 론칭했으며 패션의 상업주의나 빠른 트렌드 사이클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흔히 패션쇼 하면 정렬된 의자들 사이에서 모델이 동선을 따라 걸어 나오는 장면이 떠오른다. 캐롤 크리스찬 포엘은 전형적인 패션쇼의 관행을 깨고 모델들을 강물에 띄워 파장을 일으켰다. 흐르는 물에 몸을 맡긴 채 시체처럼 포엘의 옷을 입은 모델들이 흘러갔다. 2004년 이탈리아 나빌리오 운하에서 열린 SS시즌 Mainstream Downstream 프레젠테이션이었다. 지나가는 사람도 그 광경을 자유롭게 지켜볼 수 있었다. 운하에서 모델들이 입었던 젖은 옷은 쇼가 끝나고 밀라노에 있는 포엘의 쇼룸에 전시되었다고 전해진다.
포엘은 퍼포먼스를 통해 패션계에 메시지를 던졌다. 극단적인 표현은 업계에서 정형화된 미의 개념과 선입견에 대한 반발심을 보여주었다. 주류의 대형 브랜드에서 시작된 트렌드가 대중과 타 브랜드로 비판 없이 자연스럽게 퍼져 나가는 산업 흐름을 흘러가는 물과 떠내려가는 모델에 비유한 듯했다. 주류에서 통용되는 신체적 미의 기준을 무비판적으로 따라가는 대중을 표현했다고도 볼 수 있다.
포엘의 이전 컬렉션 무대 역시 충격적이다. 2000년 컬렉션은 무려 영안실 컨셉으로 열렸다. Best before 16/10/00에서는 모델들이 움직이지 않고 얼굴까지 옷으로 덮여 시체처럼 누워있도록 연출했다. 분장한 발만 옷 밖으로 튀어나와 있었다. 2001년 컬렉션에서는 모델들이 개 철창에 갇혀 있었으며 2002년 ‘Traditional Escape’ SS 컬렉션에서는 오피스에서 모델들이 눈을 가린 채 창문으로 탈출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이는 패션계의 엘리트주의적인 지배 구조를 깨부수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포엘은 억압이나 죽음에 관한 키워드와 연결 지은 공간에서 자유와 해방에 관한 의지를 표현했다. 죽음, 혼란 등의 주제를 탐구함으로써 의도적으로 불편함을 보여주고 한 번 더 생각하게 만드는 메시지를 그만의 방식으로 남겼다.
메시지를 전달하는 파격적인 방식만큼이나 포엘의 디자인 역시 아방가르드하고 실험적이다. 손가락, 동물 발톱이 있는 장갑, 밑창에서 흘러내리는 레진으로 운동화를 덮었다. 공업에 쓰이는 티타늄을 가죽 재킷에 활용하는가 하면 넥타이에는 실제 머리카락을 사용하기도 했다. 옷의 가장자리가 서로 잘 맞지 않거나 의료용으로 봉합한 것처럼 실이 붙어있는 제품도 있다. 그는 인체 해부학에서도 영감을 받았다. 피부를 형상화해 소재로 활용하는가 하면 가죽에 생명을 불어넣는 차원에서 가죽 안쪽에 동물의 피를 발라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색이 변하는 현상을 이용하기도 했다.


꾸준한 실험의 축적: 블레스(Bless)
블레스는 패션을 넘어 예술, 디자인의 경계를 허무는 브랜드다. 의류뿐만 아니라 가구 등 다양한 제품을 만든다. 1997년 독일 베를린과 프랑스 파리를 기반으로 이네스 카(Ines Kaag)와 데지레 하이스(Desiree Heiss)가 함께 시작했으며 블레스의 실험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초창기에 두 사람은 반투명 거즈로 상의 Sun Top을 만들었으나 큰 관심을 얻지 못했다. 1년 뒤 모피로 만든 가발 형태의 모자 Fur Wig가 주목받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서는 Team-ups 커플 침대 시트가 알려져 있는데 실제 남녀가 누워있는 것처럼 프린팅되어 신선하다. 2019년에는 나이키의 조거 팬츠를 바지 앞면에, 리바이스 데님을 잘라 뒷면에 붙여 양념 반 프라이드 반 치킨처럼 하나의 바지로 서로 다른 소재를 즐길 수 있게 했다.
또한 블레스는 SS, FW처럼 전통적인 방식으로 시즌 별 컬렉션을 명명하지 않고 “BLESS N°”라는 시리즈 번호를 붙여 프로젝트를 전개한다. 이를 통해 브랜드의 철학과 정신을 지속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게 블레스만의 큰 특징이다.
BLESS의 공식 웹사이트에는 숫자로 나열된 프로젝트 번호들이 전면을 장식한다. 각 넘버를 클릭하면 해당 시리즈의 대표 이미지, 제품명 리스트, 전시 정보, 소개된 매체까지 한 화면에 펼쳐진다. 웹사이트가 일종의 디지털 전시 공간이 되어 오랜 시간에 걸쳐 축적된 브랜드의 세계관을 담는 기억 장치로 볼 수 있다.
컬렉션 영상 역시 독특하다. N°32 Frustverderber편을 보면 모델들이 런웨이를 가로질러 걸어간다. 그러다 관객을 마주 보고 양쪽에 일렬로 선다. 그다음 한 여자가 축구공을 들고나와 가운데서 휘슬을 불자 축구 경기가 시작된다. 영상은 모델들의 옷을 자연스럽게 비춘다. 골대 앞에는 소파, 화병 등이 놓여있다. 전문 모델이 아닌 지인을 불러 블레스 제품을 입고 축구를 한다. 공이 관객석으로 튀어 나가면 웃음소리가 장내를 꽉 채운다. 자유분방한 블레스의 성격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일반인을 모델로 기용함으로써 블레스가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평범한 사람이 입는 옷임을 보여주기 위해, 옷걸이가 좋은 모델이 옷을 입어 현실적으로 소화하기 어렵거나 거리감이 들 수 있는 부분을 해소하려던 의도가 아닐까 싶다. 블레스 홈페이지에는 해당 컬렉션에 참여한 28인의 이름과 함께 착장 아이템이 올라와 있다.
제품을 통해 이들은 기존 패션 산업의 생산, 과대광고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두 디자이너가 출산 후 선보인 BLESS N° 46의 경우, 새로운 컬렉션을 선보이는 대신 친구와 고객 네트워크와 소통하며 필요한 신제품을 요청받았다. 열쇠고리, 아기 스웨터 등 다양한 디자인의 컬렉션은 일종의 주문형 패션에 가까웠다.
장인정신으로 짓는 미래: 비즈빔(Visvim)
BTS의 RM과 에릭 클랩턴(Eric Clapton)이 마니아로 알려진 일본의 비즈빔은 장인정신을 제품에 적극 반영했다. 앞서 극소량 제작하는 폴 하든, 캐롤 크리스찬 포엘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공급량이 있지만 그렇다고 대중적인 브랜드처럼 많지는 않다. 적은 공급량 대비 찾는 이들이 많으니 제품을 구하기가 쉽지 않다. 현대적이고 스트릿 스타일에 가깝지만 장인정신 하나만큼은 고집스럽게 추구하는 편이다.
창립자 히로키 나카무라(Hiroki Nakamura)는 직물 제조업을 하던 부모님 밑에서 자랐다. 청소년 시절 알래스카에 체류하며 아웃도어 활동을 자연스럽게 접하게 되었다. 일본의 버튼 스노보드에서 디자이너로 8년간 경력을 쌓은 뒤 2000년에 비즈빔을 차렸다고 한다.
하나를 입어도 오래 입을 수 있는 것이 가치가 있다고 여긴 히로키는 세계 곳곳의 다양한 전통 제조 방식과 빈티지 아이템을 연구했다. 그가 추구하는 퓨처 빈티지(Future Vintage)를 대표하는 작품 중 하나가 FBT 슈즈로 불리는 모카신이다. 히로키 나카무라가 2008년 핀란드 여행 중 건네받은 순록 가죽 신발이 밑창도 없으면서 따뜻했던 경험에서 영감을 받았다. 원주민이 신었던 스타일을 구현하면서 스니커즈의 밑창을 결합했다. “영원히 신는 신발”을 모토로 개발한 만큼 시간이 지날수록 멋스러운 가죽 소재와 보온, 통기성 모두를 갖췄다. 청바지 하나를 만들어도 방직에서부터 시작한다. 염색, 건조, 페인팅까지 수작업을 거친다. 한 벌에 250만 원을 넘기는 제품도 있는데 만들어온 수고로움을 감안한다면 비싸긴 하지만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패션 브랜드 중에 논문이란 단어를 사이트에서 언급하는 경우는 거의 비즈빔이 유일하지 않을까. 장인이 어떻게 옷을 만드는지 바느질하고 염색하는 과정 등을 글과 영상으로 담아냈다. 브랜드의 얼굴인 웹사이트에서 제품 리스트를 바로 보여주지 않고 생산 과정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비즈빔이 장인정신에 얼마나 진심인지 알 수 있다.
2018년부터 비즈빔은 <Subsequence>란 매거진도 발행하고 있다. 시간이 지나도 변치 않는 공예 문화, 예술가, 목수, 사진작가 등 문화적 고유성을 유지하는 창작자의 이야기를 다룬다. Subsequence는 다음, 이어서 일어나는 것을 뜻한다. 일련의 수고로운 과정을 거쳐 결과물이 만들어지고 창작과 사용, 문화로 이어지는 여정을 중요하게 생각하기에 나왔을 법한 이름이다.


시도, 지속, 고집스러움
이처럼 아티잔 브랜드는 궁극적으로 어떤 속도로, 어떤 태도로 살 것인지 패션을 넘어 삶의 태도와 맥락을 제안한다. 빠르게, 많이, 가볍게 더 소비하는 시대에서 소비자는 가격이 (비현실적으로) 비싸더라도 고유의 가치관을 소비함으로써 나를 드러내고 정체성을 보여준다. 알 만한 사람들만 아는 세계의 일원이 되어 희소가치를 알아보는 사람으로서 느끼는 자부심도 있겠다.
아티잔 브랜드가 침묵을 지키거나 메시지를 파격적으로 보여주는 등 각자만의 방식을 통해 설득력을 얻게 되기까지는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모름지기 꾸준함이다. 한두 번에 그치는 실험이 아닌 지속적인 실험, 이전에 보여준 것을 능가하는 어떤 혁신적인 시도의 누적이 브랜드의 생명과 그 가능성의 확장을 보여준다.
은둔하던 폴 하든이 갑자기 온갖 패션지나 유튜브에 등장하게 된다면 어울리지 않을 것이다. 결국 그들이 지켜야 하는 철학과 메시지를 고집스럽게 추구하는 것만이 그들을 그들로서 존재하게 만든다. 정교한 짜임새와 미적 감각은 놓치지 않으면서 트렌드를 쫓지 않는 뚝심. 아티잔 브랜드가 시간과 노력으로 쌓아 올린 견고한 성을 다른 브랜드가 무너뜨리거나 흉내 낼 수 없는 건 분명하다.